배상순의 작품을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표현한다면 유기적인 형태의 완전추상으로 볼 수 있다. 또 그림 소재로서는 묵단색(墨單色)의 모노크로미즘(단색주의)에 동양적인 지역성을 부여한 형태로서 불교사상을 반영한 금욕적인 표현으로 풀이된다. 또한 서양미술사를 기본개념으로 하는 진화론적인 틀에서 배상순의 작품을 보는 경우엔 그녀의 작품을 독자 예술로 생각할 만한 요소를 찾아내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작품을 그와 같은 내적 논리로만 생각하는 방식은 앞으로 점점 의미가 없어져갈 것이다.
작가란 특히 가까운 미래의 비전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점을 새삼스럽게 말하는 이유는 전후 일본 미술계에서 독자적인 위상을 구축한 쿠도테츠미(工藤哲巳)라는 작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실감했기 때문이다. 쿠도의 작품 중에는 방사능의 영향에 의해 생물이 진화를 이뤄가는 듯한 작품이 있다. 방사능의 바다 속에서 인체 부위, 동식물, 또는 전자부품이 융합해 그로테스크한 형상이 태어난다.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사고를 경험한 우리들은 그것을 환상은커녕 극히 긴박한 작가의 고발적인 증언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현재 처해 있다.
배상순의 작품은 앞에서도 묘사했듯이 쿠도 작품에 나타나는 표면적인 공격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금욕적이고 모노크롬으로 계속 그려나가는 그 그림에 다시 시선을 던졌을 때 뭔가가 태동하는 듯 생명의 숨결 같은 불가사의한 느낌을 받는 일이 있다. 역시, 배상순이 최초의 그 유기적인 선을 찾아낸 것은 두 사람의 모델을 이용해 그 틈새를 형상화해 나가는 중에 자연히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구상의 많은 생물이 그렇듯이 인간도 두 종이 있다. 편의상 남과 여라고 이름 붙여진 그 두 유형의 인간을 번갈아 가며 다양하게 조합해 세워놓는다. 그러면서 거기에 차이를 돋보이게 하지 않고 생명과 생명의 호응으로서 추상적으로 형상화하며 작품의 기본적인 요소로서 현재도 이용하고 있다.
비서양계의 작가에서 있어서 조형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기본적 요소의 탐구는 필요불가결한 행위다. 그리스 로마를 기점으로 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19세기 말의 프랑스 파리를 거쳐 뉴욕에 이르는 흐름은 지금까지의 미술사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갖는다. 하지만 의식 있는 작가는 그 흐름과는 다른 기준을 갖기 위해 자기를 표현하는 도구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전후 일본미술사 중에서 예를 든다면 다카마츠 지로(高松次郎)라는 작가는 '점'이라는 기하학의 기본적 요소를 채택했다. 점의 관념적인 인식과 실물과의 차이에 착안해 작품을 만들어내고 그 후에도 비슷한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더욱이 그 연장선상에서 '모노하(もの派, 사물을 있는 그대로 놓아 둠으로써 사물과 공간 각자의 고유성과 관계성을 살피는 장르)'라는 독자적인 미술운동의 태동에 큰 역할을 했다. 배상순의 유기적인 선이 그와 같은 역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여기에서 강변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뭔가를 만들어내는 데는 그 기본이 되는 요소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배상순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근원적인 요소를 최초로 발견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탐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배상순의 선은 커다란 검은 덩어리와 연결돼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초기작품에서는 그와 같은 두 사물의 관계성을 나타낸 작품이 두드러진다. 그 선의 기원을 생각해보면 검은 덩어리는 곧 다양한 생물을 만들어낸 대지를 시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화면 하단에 머물러 있던 그 검은 덩어리는 머지 않아 화면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복수의 검은 덩어리가 화면 속에 존재하며, 그것들을 배상순의 유기적인 선이 연결해주고 있다. 이것은 마치 우주공간에 떠 있는 혹성과 거기에 사는 생명체와의 관계를 거시적으로 도식화한 듯이도 보인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생물과 무생물의 병행관계를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미술의 기원을 생각할 때 종교를 그 원천의 하나로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보다 근원적으로 그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구석기시대, 현생인류가 깎아 만든 장식물 같은 인형을 예로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아는 종교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종교와 미술의 관계는 전술한 서구미술의 흐름 속에 대거 반영되어 인간중심주의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그 연장선상에서 추상예술이 탄생했다. 그에 반해 동양에서는 거시적으로 보면 비인간중심주의적인 예술로 일관해 왔다. 그것은 어느 의미에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예술이다.
여기서 다시 앞서의 주제로 되돌아가서, 배상순의 작품을 그 동양적인 흐름의 예술이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표현된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 걸까. 그에 대해서는 예스면서 동시에 노라는 답변이 가능하다. 인류가 창조한 종교라는 관념은 무한의 세계를 상정하는 것이리라. 그것은 동서양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방사능 오염이 단순한 환상이 아니게 된 오늘날, 종교가 표현하던 무한의 세계는 적어도 우리 인류에게는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리는 깨닫게 됐다. 배상순의 초기작품은 종교세계가 상정한 무한의 세계를 응시하며, 대지와 인간이 직접 연결돼 있던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근년 들어 배상순은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에 도전하고 있다. 일견 지금까지의 배상순 작품의 대지와 그림의 관계를 반전시킨 듯한 구조의 작품이다. 하지만 조금만 작품을 주시한다면 그 변화에 놀라게 된다. 검은 덩어리가 반전한 듯이 보이던 흰 덩어리는 사실상 작가가 그린 선의 무수한 중첩에 의해 형성됐기 때문이다. 작가가 찾아낸 생물들의 관계성을 표현해낸 선이 수많은 집합체가 되는 하나의 선, 혹은 우주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보다 고차원적인 세계관을 표현해내려는 희망에서 이 새로운 스타일을 찾아낸 듯하다. 작가가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근년의 지구규모의 천재지변에서 영감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배상순의 작품은 이런 식으로 우리가 아직 본 적이 없는 세계를 현현하는 듯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