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순은 청색먹물을 섞은 젯소(흰 그림물감)를 칠해 굳힌 바탕화면 청색먹물과 목탄으로 그린 작품과, 검은 벨벳의 바닥에 면상필(붓끝이 가늘고 중간이 빳빳한 붓)로 젯소로 가는 선을 무수히 그려, 칠흑을 떠올리게 하는 두 가지 유형의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이들 작품은 원래 인체 디자인에 기초해 추상화한 윤곽선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 점 외에도 유기적인 선의 운율이 있어 그것이 생명과 현재로까지 연결되고 있다.
스스로를 알기 위해 인간을 그리기 시작한 배상순 작가는 몸의 움직임 자체에 흥미를 갖고, 인간과 삶의 형태에 대해 계속 탐구해 왔다. 그러한 탐구의 방식으로 두 사람의 모델을 세워, 여자끼리, 남자끼리, 또는 남녀간이라는 조합의 사이에 생기는 공간의 느낌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점에 주목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작용하는 에너지의 교환, 흐름의 방향이나 강도는 항상 변한다. 작가는 이와 같은 보이지 않는 불특정한 아우라를 찾아내 그것을 중요한 컨셉으로 삼고 있다.
그녀의 대범한 한 가닥의 선은 서양적인 절단선과는 다르다. 동양적이며 양쪽으로부터 안과 밖의 세계가 서로 교차한다. 마치 묵의 흔적처럼, 주변의 세계로 번져나가며, 외부 세계를 의식하게 한다.
현재의 작품에 연결되는 <흑과 백의 사이에 생기는 경계>, <흑백이 역전하는 이미지>는 이처럼 안과 밖에서 섞이는 선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배상순의 작품은 그녀의 특질이라고도 할 만한 강렬하고 강한 생명감, 정서를 배제한 흑과 백의 금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색과 단순한 선으로부터 그림을 이뤄간다. 감각적인 색의 조합이나 작법의 유행에 치우친 근년의 회화동향과는 대척을 이루며 근원적인 회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진지한 창작자세에서 나오는 그림의 생명력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배상순의 작품은 인간관계가 경박함에 빠지기 쉬워지는 현대에, <사람과의 연결>에 살아가는 힘과 의미를 느끼게 해준다. 또 우리들에게 회화의 본질을 떠올리게 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겹쳐 쌓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르익어가는 정감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흘러 넘친다.
근작에서는 생명탄생에의 유대를 깊이 느끼는 체험을 바탕으로, 결코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엮인 끈을 이용해 입체작품을 제작한다. 여백 속에 사람과의 유대 가능성을 품은 채 작가가 앞으로 어떤 진화를 보여줄지 기대를 갖게 된다.